작은책 1월호 기획특집 기사의 일부 내용을 올립니다.
노래로 만나는 한국 사회
(이지상/가수, 성공회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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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는 성공회대학교에 '여럿이 함께'라는 교수 축구팀이 있어요.
뇌성 마비 장애인 축구단인 '곰두리사랑회 축구단'과 자매결연을 맺어서 1년에 네댓 번씩 같이 축구를 합니다. 그 팀에 김재용 씨라는 골키퍼가 있습니다. 우리는 공이 저쪽으로 오면 저쪽으로 뛰고, 이쪽으로 오면 이쪽으로 뛰잖아요. 근데 이 양반은 공이 저쪽으로 오든 이쪽으로 오든 위로 뜨든 아래로 구르든 일단 무조건 넘어져요. 무조건 넘어져서 볼을 잡아요. 왜냐 하면 자기 신체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잔디 운동장이면 좀 낫지만 맨땅에서 한 경기 하고 나면 팔다리가 다 까져요.
'나는 저 사람처럼 진정성을 가지고 공을 찬 적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축구는 골을 많이 넣으면 이기는 경기입니다. 앙리처럼 손으로 넣든 어쩌든 골만 들어가면 되잖아요. 이것이 효율성이죠. 만약 규칙을 바꿔서 선수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점수를 매기도록 하면 어떨까요? 이른바 진정성에 대한 평가를 해서 승부를 낸다면 우리 축구팀은 곰두리사랑회 축구단보다 훨씬 못하겠죠.
우리 사회를 효율성이 아니라 진정성으로 이해한다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겠죠. 얼마 전에 헌법재판소에서 이상한 판결을 내렸잖아요. '절차는 하자가 있는데 결과는 유효하다' 뭐 이런 거였죠? 과정에 문제가 많다고 과정을 부정했는데 결과는 오케이라는 식이죠. 과정이라는 말 속에는 희망, 공동체, 나눔, 진정성과 같은 가치들이 다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헌법재판소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한 것은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이런 가치들을 부정한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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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 마비 장애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아시죠? 입술이나 혀만 가지고 얘기하지 않거든요. 적어도 얼굴 근육 전체를 쓰거나 그래도 안 되면 온몸을 비틀어서 한 마디 합니다. 저는 말을 빨리 하는 편이지만, 그 사람들처럼 한 마디 뱉기 위해서 온몸의 근육을 다 쓰는 진정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죠. 그 사람들은 걸을 때 자기 발걸음을 하나하나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제대로 딛고 있나 확인하지 않으면 바로 넘어지죠. 저는 그 사람들보다 빨리 달릴 수 있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을 그분들처럼 진정성 있게 걷지는 못하거든요. 지금 같은 효율성의 세상이 아니고, 진정성의 세상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한참 밑에 있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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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나 메이시라는 심층생태학자가 티베트에 생활협동조합을 만들려고 갔습니다. 라마승들하고 회의를 하는데 조안나 메이시의 찻잔에 파리 한 마리가 퐁당 들어가 버렸어요. 초에걀 린폰체라는 어린 여승이 자꾸 쳐다보는 거에요. 그래서 조안나 메이시가 "괜찮아요. 건져 재고 먹으면 돼요" 하는 뜻으로 손짓을 했어요. 그런데 또 쳐다봐요. 그래서 이번에는 말로 "괜찮습니다. 파리가 빠진 것뿐이에요" 했는데, 초에걀 린포체가 살며시 일어나 조안나 메이시 앞으로 옵니다. 그리고 파리를 건져서 밖으로 나갔죠. 초에걀 린포체가 조금 있다가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조안나 메이시에게 귓속말로 얘기하죠. "파리는 괜찮습니다." 조안나 메이시는 삶의 기준이 자신이었죠. 그렇지만 초에걀 린포체의 기준은 파리였거든요. 기준을 굉장히 낮춰 잡았죠.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랑은 낮은 곳에 있다" 하는 얘기들 많이 들어 보셨잖아요. ..............
그러니까 파리가 중요하죠. 작은 것이 중요한 겁니다. 지하철에 노약자, 장애인용 승강이 있잖아요. 그걸 노약자, 장애인만 타나요? 애기 안은 엄마도 타고, 출근 시간에 늦은 직장인도 타고, 피곤한 젊은 사람들도 타죠. 장애인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이용할 수가 있는 거잖아요. ...............
작은 것들은 상대방을 해칠 힘이 없죠. 힘이 센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힘을 나쁜 쪽으로 쓰면 많은 사람들이 상하게 해요. 폐지 줍는 노인들은 해 끼치는 게 뭐가 있어요? 저희 옆집에도 그런 분들이 사시지만 저희 집에 해 끼칠 게 전혀 없거든요. 평화가 가장 낮은 곳에 있다는 말씀을 두 가지 예를 들어서 드리는 겁니다. 작은 것, 낮은 것, 힘 없는 것들은 다른 것들을 상하게 하지 않아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평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돼야 해요. 평화 지수 또는 사회 복지 지수의 풀발점도 바로 그 지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도 평화도 낮은 곳에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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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도 아픈 곳이 중심이어야죠. 개인이 그렇고, 가족이 그런데, 사회도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제가 간이 안 좋아서 병원을 가려고 돈을 모았어요. 그런데 병원을 가다 보니까 가게에 있는 신발이 좋아 보여요. 그래서 병원에 갈 돈으로 신발을 사 버려요. 미친놈이죠? 제 부인이 아파서 병원에 데려가야 되는데 제가 그 돈 가지고 술을 마셔요. 망나니죠?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아픈 곳이 그렇게 많은데, 강둑 따라서 가로수 심는대요. 강둑 따라 자전거 도로를 놓는대요. 아픈데 병원 갈 돈으로 운동화 사는 사람을 미친놈, 망나니라고 얘기했는데 그렇다면 우리 사회도 미친 사회, 망나니 사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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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내용이 제목과 어울리지 않죠?^^ 이 글이 꽤 길더라구요. 이렇게 시작되어 친일 작곡가, 작사가, 노래 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저는 그 보다 서두의 글이 맘에 더 와 닿아서 올립니다. 친일 작곡가, 작사가, 노래 관련되어서 요약하자면,
홍난파의 봉선화가 우리 민족의 애환과 설움을 담은 노래가 아니라 일본을 위한 노래라는 이야기.
현제명의 희망의 나라로가 일본의 태평양 전쟁과 관련된 노래라는 이야기.
선구자가 만주 벌판에서 활약하던 조선 독립군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만주국 건설을 위해 애쓰는 일본인들을 가리킨 노래라는 이야기 등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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