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학교의 개교를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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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이상한 학교"가 문을 열었다기에 물어물어 찾아왔더니 정말로 이상한 학교로군요.
물론 남녀공학은 아닐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이렇게 여자들만 우글거리는 동네에 나같은 종자가 여기 기웃거려도 괜찮은 것인지 겁이 나기도 하는데, 가끔 남자들 이름도 있구나 하고 조금은 안심을 하다가 자세히 보니 "을호"니 "명호"니 하는 이름들이 모두 남자가 아니고 여자들이더란 말입니다.
남자 이름이래야 한두명, 박재동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 뿐인가 온통 넉자 이름을 쓰는 여자들이라 더욱 겁이 나는 것입니다.
나는 네글자로된 여자이름을 보면 먼저 신여성임을 선언하는 성명서를 이마에 붙인 사람들 같아 말한마디 잘 못할까 눈초리라도 불량해 보일까 괜한 트집이라도 잡힐 것 같아서 겁부터 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 삼십분 학교 교실, 강당, 운동장, 교장실까지 둘러보니 한마디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둘러보고만 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어서 잠깐 앉아 쉬면서 옛날 이야기 한마디 풀어 놓고 가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1974년엔가 - 벌써 삼십년도 더 흘렀군요 - 제가 근무했던 김수근선생의 공간(空間)사에서 "안동댐 수몰지구 답사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버스 한대의 국내 명사들이 일박이일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박통의 오랜 꿈으로 안동에 다목적 댐이 완성되었는데 이제부터 담수(擔水-물을 담아 가두는 일)를 시작하므로 이제 곧 그 물 밑에 잠겨버릴 이퇴계선생의 진성 이씨, 예안 이씨 종가 마을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기록으로나마 남기자는, 마음아프고 갸륵한 여행입니다.
토요일 오후에 버스로 일곱시간인가를 달려서 마침 그달에 문을 연 안동관광호텔에 늦은 저녁 시간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러곤 저녁을 먹고 자기전에 호텔마당 잔디밭에 둘러 앉았는데 자연스레 술판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 그런데 아까까지는 안 보이던 웬 젊은 여성하나가 그 사이에 끼어 앉아 자리를 빛내고 있었어요.
헌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술이 몇 순배를 돌자 이 아릿다운 여성은 자리를 빛내는 정도가 아니라 자리전체를 석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술도 술이려니와 거침없는 언변에, 나중에는 거침없는 면박에, 더 나중에는 끝도 없는 노래에, 거기 함께 앉았던 남자들이 겁에 질려서 슬금슬금 모두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외국인에게 정부를 비판하면 긴급조치 9호가 적용되던 때니까, 함께 있기가 당연히 겁나지요.
사람들이 수군수군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어느 신문사 문화부 기자라고 했습니다.

열두시가 넘도록 호텔 앞마당에서 떠들고 노래를 해 대니 누군들 가만 있겠습니까?
이곳 저곳에서 창문을 열고 "야 잠좀 자자."느니 "조용히 안할래?" 등등 험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제서야 모두들 자러 가자고 일어서는데 이 "여기자" 가 술을 더 마시자는 겁니다.
지금 자러 가자는 놈들은 모두 비겁하다는 겁니다.
아마 댓명쯤 될까 남은 인원이 안동시내로 술집을 찾아 나섰는데 한시가 가까웠으니 가게가 모두 닫아 걸어 갈데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헤메다가 겨우 한 군데 불이 켜 진 곳을 찾아들어가니 생고기를 파는 정육점인데 한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서 주인인 듯한 사람과 몇이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서울서 온 사람들"이란 말에 자리를 내어 주었지요.
고기는 다 팔리고 없다면서 바께스에 반쯤 담긴 소의 내장들, 간, 염통, 밥통, 지라, 이런 것들을 내주며 구워서 잡수시라는 겁니다.
아마도 안동의 우시장에서 직접 온 물건이었는지 그 피투성이 내장의 소금구이는 신선해서 그런대로 좋았습니다.
우리는 평생 처음보는 그 이상한 부위들을 안주삼아 안동 제비원 소주 24병 한박스를 다 마시자고 작정을 하고 아마도 동이 틀 때까지 해서 그걸 다 마시고는 고성방가 노래를 부르며 그 먼거리를 걸어 호텔까지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중 유일한 여성 참석자가 이 모든 일에 주동적 역할을 한 것은 말 안해도 알만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방까지 돌아왔는지 가물가물한 채로 한두시간 눈을 붙이고 아침 식사시간에 맞추어 식당에 내려가니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식사는 스테이크 정식이라는 겁니다.
나는 크림 수프 한 접시를 비우고 속이 쓰려서 수프를 좀 더 달랬더니 새로 훈련받은 웨이터가 말하길 양식이란 코스로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니 수프만 더 줄수가 없다는군요. 할수 없이 뛰어 나와 버스로 달려가니 전원이 착석한 채 나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죄송, 죄송"을 연발하며 뒷자리에 가 쓰러졌는데 아니 어젯밤 그 여기자가 전혀 말짱 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사람들과 담소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내 기억에 홍종인, 박고석, 장욱진 같은 어른들과 아주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점잖은 대화에 취재에 농담에 그림을 그리시는 세분과 우아한 분위기에 젖어 있습니다.
나는 도무지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았습니다. 바로 두세시간 전까지 젊은 남자 다섯을 뒷꽁무니에 달고 안동시내를 누비며 있는 목청껏 악을 쓰며 몇백곡인지도 모를 레퍼토리가 바닥이 나서 나중에는 박인환의 시에 곡을 붙인 "세월이 가면"을 수십번 반복해 불러대던 여성이 둔갑을 하여 동그랗게 눈섶을 그리고 입술엔 인주칠을 하고 앉아 새침을 떨고 있으니 이게 바로 도깨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도깨비는 밤새도록 사람을 놀리다가 새벽이 되면 부지깽인가 빗자룬가 그런 걸로 변신을 한다는데 이런 미녀 도깨비는 어찌된 일인지...
나는 그날 하루 그 도깨비를 관찰하면서 거기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서울에 돌아와서는 이 도깨비를 혼자서 흠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도깨비를 좋아하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요? 도깨비에게 홀린 사람이 되겠지요.

도무지하고 문화부 기자라면 이흥우, 이구열, 조동화 같은 아저씨들이나 보았을까 여기자라는 존재조차가 생소한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디서 요런 예쁘고, 발랄하고, 똑똑하고, 술 잘먹고, 노래 잘하고, 욕 잘하는 나의 이상형이 튀어 나왔을까?
이 여자는 무슨 신분증을 가졌길래 이렇게 막나가도 괜찮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태생이 공립학교 출신의 못말리는 모범생에다가 철저한 공돌이 정신을 교육 받고 있던 시점이라 이건 도저히 연구도, 이해도, 찬성도, 동조도, 아무 것도 같이 할 수가 없는 상대입니다. 날더러 기억력이 좋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 때 나의 문화적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오늘까지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을 하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한번 만났던 터라고, 서울에 온 후 연락이 오고 갔습니다.
수몰지구에 대한 감상 등을 묻거나 자료를 청하는 전화가 왔고, 그 일이 끝나고도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벌어지는 아파트라는 주거패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런 전화도 오고, 아파트에 반대라느니, 행정수도에 반대라느니 주절주절 대답을 해주면 그걸 원고지에 써달라고도 하고, 원고를 받으러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보니 그 글발이 장난이 아닙니다. 한 번 말발과, 욕발과, 술발과, 얼굴발에 크게 데인 몸이었던데다 정말 그 글발에 다시 한번 완전히 녹아버렸습니다. 내가 대항을 할 수 있는 무기는 하나도 없었어요. 겨우 술이나 비슷한 수준으로 맞추어 볼 수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나는 만나면 또 술이나 마시자고 조를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면 그 예의 세상비판이 하늘을 찔렀지요. 세상의 모든 남자가 다 비겁한 놈들이라는 거였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비판의 대상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떡허든 나의 과거 기득권 내력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말도 못하고 술만 들이키고 듣기만 했지요. 나중에 들으니 그 때는 내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인줄 알았다나 뭐라나...

아니 그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상대방이 알아채는 일이었지요.
왜냐하면 도깨비 세상에는 삼단논법, 육하원칙도 없는 것일테니, 만일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기만 한다면 막무가내로 당장 같이 살자고 하면 어쩌나, 아니 같이 죽자고 하면 어쩌나. 그러면 난 정말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지 않으냐.
정말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를 풀어놔도 되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여러곳에 실례가 안 되는 한에서는 오래 못했던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이제 뭐 그 부군으로 말하더라도 연세로보나 건강으로 보나 이런정도 일을 가지고 혈압을 올릴 일은 아닐테고, 이 모든 일은 정권도, 세상도 바뀌고 공소시효도 지났으니 용서를 받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게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실체가 드러나는 우리의 장본인으로 말하더라도 하도 오래전 일이라 생각도 안난다거나, 사실무근이라거나, 한때 일이니 그런 얘기 고만하자거나, 한마디로 벗어날 수도 있는 먼 옛날 과거지사라 무슨 이야기가 나와도 크게 걱정은 안 되실 터이고, 더군다나 살살 써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있고 했으니... 그 정도로 하고...
그래 혼자서 오래 전전긍긍이라는 걸 하다가 나는 모범생 공돌이의 잔머리를 굴려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감추자. 속이자. 그리고 도망가자.
일부러 피했습니다. 마음은 아팠지만 그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혼자 술을 먹으면 맨날 그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만 중얼거리며 괴로운 마음을 달래었습니다.

과연 그렇게 하니까 세월은 가더군요. 사실 말은 그래도 은근한 눈빛으로 손목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으니 고통이랄게 그리 대단치는 않았겠지요.
한 15년이 지났을까. 이제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을 때쯤 해서 정태기, 권근술 두 선배가 새로 신문사를 만든다고 그 신문사 주식을 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온 겨레가 모두 주식을 사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한 해 위 선배들이었지만 무서운 선배들입니다. 게다가 대학 동기생인 성한표까지 거기 가세해 있었습니다.
나는 없는 재산에서 가능한 모든 걸 통털어 주식을 샀습니다. 투자가치가 있을리 없었지만 나는 그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데모만 있다하면 도망을 쳐 다니던 내 비굴한 과거사에 대한 속죄랄까. 그들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그런 것들이 겹쳐서 나는 면죄부를 사는 셈치고 거액을 투척한 것입니다. 그 정도 가격대라면 내 젊은 날의 배상으로는 괜찮을 거라는 계산이었지요.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일차 공모가 목표미달이라 이차 모집이 있다니 또 도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게다가 이번엔 그 도깨비 같은 김모 여기자도 거기에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아, 이제 남자여자 도깨비가 다 모이는구나. 세상이 바뀌는구나."
나는 생각 끝에 그때 준재벌 소리를 듣던 사업가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형도 면죄부를 사세요. 온 겨레가 다 산대요.” 그 선배는 한참 생각하더니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거금을 내어 놓았어요. 내가 낸 것의 두 세배는 되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기업을 하고 있으니 이름이 밖에 나타나면 안 돼. 자네 이름으로 사게.”
나는 이제 홀가분해졌습니다. 이 정도 가격대의 부적을 가졌다라면 세상이 바뀌어도 이걸 내보이고 면죄를 받을 수 있겠지...

새 신문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도깨비 같은 전화를 받는 일은 뜸해졌습니다. 이제 문화부 기자가 아니라 새 신문의 주역 그룹에 들어간 때문으로 이제 나에게 의견을 묻거나 인터뷰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이랄까 하여튼 상대방이 높아짐으로 해서 상대적으로 나는 지위가 낮아진 셈이지요.
대신에 명칼럼니스트로써 깃발을 휘날리는 그녀의 글들을 읽으며 멀리서나마 혼자 옛일을 추억하곤 했지요.
그러다가 또 한참 세월이 지나고 이제 그의 기명칼럼 앞에는 예쁜 얼굴 사진이 함께 실리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지났는데도 옛날처럼 예뻤습니다. 글발은 예전보다 더 장난이 아닙니다. 누군가도 이야기 했듯이 “간단명료하고 정곡을 찌르는” 글들을 사진과 함께 읽는 일은 이제 일주일에 한 번씩 느끼는 혼자만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정말 오랜만에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신문사를 그만 두고 마포 어딘가에 후배들이 오피스텔을 얻어 집필실이란 걸 마련해주었다는 거였어요.
그날 저녁 당장 달려가 보았지요. 신문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좀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후배 두 사람이 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명호라나 명숙이라나 그런 이름들이었는데 이들이 집필실 지킴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서 현관 초인종이 울리자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며 “충-성”을 외치는 것입니다. 저는 여자들이 이러는 것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넷이서 밖으로 나가 마포 어디 골목 속의 술집에서 소주잔이 돌려졌습니다. 몇 순배가 돌아가자 말투와 어조와 이야기들이 SP조(18調)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이내 자기들의 랭귀지로 방언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잘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거론되며 비겁한 놈으로 매도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하 도깨비들도 새끼를 치는구나. 이들이 한의사로 위장한 새끼 도깨비들이로구나...

저는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정권 초기에 유인태가 김선주씨를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유인태가” 라고 말해서 미안하지만 - 이래봬도 조용히 말하거니와 유인태, 김근태, 박원순, 손학규, 노회찬, 정운찬, (아, 사형수 이철도 있군요) 이들이 모두 제 후배들이거든요. 그리고 유인태는 가장 귀여운 후배이고....이렇게 사람 보는 안목도 있지 않습니까?
하여간 이 연약한 여인이 유인태를 빈손으로 돌려보냈다는 사실에 저는 다시 그 옛날 흠모의 정이 되살아났습니다. 오랜 세월 겨우겨우 봉합된 마음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것처럼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어지간한 남자라 해도 높은 사람이 무슨 부탁을 하겠다고 그런 식으로 찾아오면 아마도 현관 바닥에 꿇어 앉아 손등에 baiser(Fr. 입맞추다) 하겠지요, 아니면 입술에 하던가, 하다 못해 구두 콧잔등에라도 입맞추며 충성심을 전해달라고 했을텐데...
"그냥 끝까지 언론인으로 남는 사람도 있어야지"라고 했다던가? 아니 “기자는 기자여야지.”라고 했다던가? 정말 듣기 아름다운, 눈물 나는 이야기였습니다.
선주씨가 거론한 “자장면과 삼판주”에 나오는 저의 돌아가신 은사님처럼 “은퇴는 은퇴여야지.“ 라며 건교부나 서울시의 어떤 자문위원회, 심사위원회에도 안 나가시던 어른은 우리 사회에 드물었습니다.
오죽하면 젊은 애들이 부교수만 되면 어디 위원회 같은데 끼어 보려고 교수실은 비워둔 채, 여러 군데 줄을 대고 명함을 돌리는 세태입니다. 3공, 5공 때는, 아니 요즘도, "언론인 망국"이란 말이 돌아다닐 정도로 기자출신들이 나라를 들었다 놨다 했지요.

그러고 또 한 삼년이 지난 엊그제 그 후배들이 무슨 시대적인 사명감으로 이상한 학교를 열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물어물어 여길 찾아 와보니 그때 마포에서 본 세 도깨비가 수십 명으로 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더 알찬 논리로 무장하고, 더 세련된 기술로 위장하고, 더 무지막지한 번식력으로 그 세력을 확장할 것 같은 낌새입니다. 아니 이들이야 말로 총보다 무섭고 칼도 두렵지 않다는 "펜"을 수샙개라도 품속에 감추고 다니는 무서운 족속들인데 이렇게 많이 모여 있으니 어찌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나에게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입니다.
아무쪼록 이 이상한 학교가 “방망이를 휘두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 큰 일들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선 그 대운하부터 못하게 해주시고, 더 나아가 우리국토 다 말아먹는 건설동맹의 마피아들을 모두 혼쭐내어 쫓아 주세요.
손오공처럼 머리털을 뽑아 입김을 휙 불면 똑같은 원숭이가 3천 마리 태어나듯이 이 학교 학생수가 숫자로도 번성하시길 바랍니다. 그 졸업생이 이 나라를 모두 뒤덮을 만큼 창궐하여 그 떼거리가 왜구보다도 공산 오랑캐보다도 더 넘쳐나서 독도 이름도, 동해이름도 되찾아주시고, 고구려 이름도 제자리 찾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한중일을 통일하고 (아니이, 문화적으로 말이요) 제국주의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에서 세계 4위가, 아니 기왕이면 1위가 되게 해주세요.
지금은 꼭 짝짓기나 체외수정을 안해도 인터넷인가 UCC인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세를 불릴수가 있다드먼요.
또 그래서 한국의 건축문화가 세계의 건축문화를 계도하게 해 주세요.
제가 설계를 맡아있는 옥인동 재개발 계획도 좀 잘되도록 도와 주세요. 한국에서 새로운 주거모델을 만든다고 하니까 혼자서 너무너무 힘이 들어요.
그리고요 춘향이, 장금이, 논개, 사임당, 난설헌, 황진이, 매창, 홍랑, 등의 매력있는 복제인간도 많이 만들어 여러곳에 철철 넘치게 해주세요.
모두들 용비어천가를 부른다고 나도 따라 부르는건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노랠 부른다면 정읍사를 부르겠습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

- 끝 -